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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렇게 힘든 방식을...

대통령도 놀라게 만든 은둔 고수

지난 17일, 문재인 대통령은 새해 첫 지역 경제 투어를 실시했습니다. 대통령이 2019년의 첫 번째 목적지로 정한 곳은 다름 아닌 울산광역시였죠. 문 대통령은 전국 최대의 수소 생산 공장인 덕양 3공장을 방문한 뒤 정의선 현대자동차 수석부회장, 최창원 SK 가스 부회장, 이필희 필드터프승목  대표, 권순미 대오비전 대표 등과 오찬 간담회를 진행했습니다.


출처: 한국일보

여기까지는 기업 주도의 지역 경제와 미래 에너지라는 주제로 함축될 수 있는 일정이었는데요. 대통령의 발걸음이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의외로 조금 더 전통적이고 소박한 장소였습니다. 문 대통령은 이곳에서 일하고 있는 장인에게 "왜 이렇게 힘든 방식을 고수하시냐"고 묻기도 했죠. 그 의외의 장소는 다름 아닌 울산 외고산에 위치한 옹기마을이었다고 하네요.


출처: 중앙일보


과학이 살아 숨 쉬는 옹기


'옹기'라고만 하면 너무 광범위해 정확히 뭘 일컫는지 애매하게 느껴지실 수도 있습니다. 옹기는 약토라는 황갈색의 유약을 입힌 질그릇 전부를 통틀어 이르는 말로, 잿물을 입혀 구운 오지 그릇과 그렇지 않은 질그릇으로 나뉘죠. 


한민족은 삼국시대부터 옹기 형태의 항아리를 제작했고, 그 형태와 쓰임도 점점 발전해 왔습니다.  12세기 전반 송나라의 서긍이 쓴 <선화봉사고려도경>에는 쌀과 장을 저장하는 용기로 큰 독을 사용하였으며, 과일이나 식초, 식수 저장용으로도 쓰였다는 기록이 남아있죠. 유약을 입혀 만드는 현재의 형태는 17세기, 그러니까 양란 이후 사회 변화에 따라 생겨난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옹기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시골 할머니 댁에서 볼 수 있는 김치와 장류를 보관하는 장독들, 집에서 찌개를 끓일 때 사용하는 뚝배기 등이 모두 옹기의 일종입니다. 재료와 제작 방식에 따라 접시나 다도구, 약탕기 등도 옹기가 될 수 있고요. 


출처: EBS

흙으로 빚은 뒤 가마에서 구워내는 옹기는 음식물을 보관하기에 여러모로 적합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매끈해 보이지만, 흙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옹기를 구성하는 입자 사이에는 작은 틈이 있습니다. 이 틈 사이로 공기가 들락날락하죠. 흔히 '옹기가 숨을 쉰다'는 표현을 사용하는 이유입니다. 


또한 음식에 있을 수 있는 잡 물질을 빨아들여 옹기 벽에 붙이거나 가라앉히는 정수성, 숨구멍이 수분의 열기를 빨아들여 밖으로 빼내는 온도 조절성은 장류 등 장기 보관을 요하는 음식물이 썩지 않고 잘 발효될 수 있도록 돕습니다. 부엽토와 잿물이라는 자연 친화적인 재료를 사용하기 때문에 깨지거나 수명이 다하면 자연스레 본연의 흙으로 돌아가는 것도 장점이죠. 


출처: 한국일보 / 문화유산채널
이렇게 훌륭한 점이 많은 옹기지만, 만드는 데에는 아무래도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듭니다. 공장에서 손쉽게 찍어내는 플라스틱 · 스테인리스 그릇과의 경쟁은 쉽지 않았죠. 질그릇 문화는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된 1960년대 말부터 차츰 쇠퇴합니다. 문화부는 사라져가는 옹기문화를 보호하기 위해 1989년 5월, 옹기 인간문화재를 처음으로 지정합니다. 1990년에는 옹기장(옹기를 만드는 기술자)을 중요무형문화재 제96호로 지정하기도 했죠. 

전국 최대 규모의 민속 옹기 마을

출처: 울산 옹기 마을 웹사이트

세계 유일의 옹기 생산 국가인 한국에서 만드는 옹기의 50% 이상은 오늘 소개할 외고산 옹기마을에서 나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옹기의 반 이상이 여기에서 만들어지는 것이죠. 하지만 이 마을이 형성된 것은 생각처럼 오래된 일은 아닙니다. 외고산 옹기 마을은 1950년대부터 옹기를 굽기 시작했습니다. 옹기를 굽기에 좋은 환경이라는 소문이 나자 전국 각지의 옹기 장인·도공들이 몰려들의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고 하는데요.  이렇게 모여든 장인들은 서울뿐 아니라 미국· 일본 등지에까지 옹기를 수출하기 시작하고, 외고산 옹기마을은  외국 도예가들까지 견학차 방문하는 장소로 거듭납니다. 


이 마을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이 옹기를 제작하는 것은 아닙니다. 산업화와 함께 옹기에 대한 수요도 줄어들었기 때문에 지금은 128가구 중 40여 가구만이 옹기 제작의 맥을 잇고 있죠. 이들은 현대인의 달라진 취향에 발맞춰 다양한 용도와 디자인의 옹기를 생산하는 등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중입니다. 


출처: 아시아 경제

하지만 변화에 적응한다는 말이 곧 품질을 타협하거나 전통방식을 저버린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외고산 옹기 마을의 장인들은 공기와 불순물을 제거하는 흙 밟기, 흙을 떡가래처럼 길게 늘이는 질재기, 흙을 넓적하게 펴고 백두 가루를 뿌리는 바탕 작업, 그릇벽 만들기, 수레질, 근개질 등의 전통 제작 과정을 꼼꼼하게 거치죠. 문재인 대통령이 '왜 이렇게 힘든 방식을 고수하시냐'라고 물은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겁니다. 


가족 나들이로 딱


출처: 여행매거진 트래비 브런치

'옹기마을'이라는 이름 때문에 꼬장꼬장한 장인들이 모여 폐쇄적으로 생산에만 몰두하는 지역일 거라고 생각하셨다면, 그건 오산입니다. 외고산 옹기마을에서는 옹기 제작 아카데미, 옹기 축제 등 다양한 행사와 프로그램으로 지역 경제를 활성화하는 동시에 옹기를 널리 알리고 있죠. 


옹기마을에서 방문할 만한 대표적인 볼거리로는 울산 옹기 박물관을 꼽을 수 있는데요. 기네스에도 등재된 세계 최대 옹기를 비롯해 약 300여 점의 다양한 옹기를 만나 볼 수 있습니다. 이 박물관에는 옹기의 역사부터 생활문화에 깊이 파고든 옹기의 모습, 옹기의 맥을 잇는 장인들의 작업과정이 전시되어 있어 옹기에 관한 전반적인 지식을 쌓을 수 있습니다. 항아리 모양의 의자가 소담하게 놓여 있는 휴식공간도 잘 갖춰져 있어, 아이나 노인을 동반한 가족들도 무리 없이 둘러볼 수 있죠. 


출처: 환경일보

직접 흙을 만지며 옹기를 만들어 볼 수 있는 '옹기 아카데미'도 있습니다. 옹기 만들기는 흙 반죽도 처음, 물레 사용도 처음인 초보자들에게는 다소 어렵고 까다로울 수 있는 작업인데요. 선생님이 하나부터 열까지 친절하게 알려주신다고 하니, 도전해볼 만한 프로그램입니다. 흙 만져보기 등의 간단한 체험은 무료, 빚기부터 장식까지 본격적으로 작품을 만드는 과정은 한 작품당 7,000원이라고 하네요. 


출처: 한국관광공사 / 네이버 블로그 맛소클짱

지난해 5월에는 옹기 축제도 열렸습니다. 아이들을 겨냥한 워터슬라이드, 민속 체험, 맨발로 흙을 밟으며 뛰놀 수 있는 흙 놀이터 등이 준비되었다고 하는데요. 그렇다고 어린이들만 좋아할 축제인 것은 아닙니다. 전문가들의 솜씨를 엿볼 수 있는 울주군 공예협회 전시회를 비롯해, 뜨거운 옹기 화로 속에서 금세 노릇노릇 구워지는 '3초 삼겹살'에 막걸리나 식혜를 곁들일 수 있는 옹기 주막도 만나볼 수 있었으니까요. 


옹기를 만드는 전통마을이라고 하니 왠지 지루하고 촌스러울 것 같은 선입견도 생기지만, 외고산 옹기마을은 오히려 젊은 층의 긍정적인 반응을 얻는 장소입니다. 마을의 구석구석이 예쁘게 꾸며진 데다 옹기를 이용한 독특한 작품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어 SNS용 사진을 찍기에 최적의 장소라는 의견이 많았죠. 어린이들은 흙을 만지고 밟으며 뛰놀 수 있어 좋고, 나이 든 분들은 질그릇과 항아리의 추억을 되새길 수 있으니 온 가족이 나들이를 가기에도 적합합니다. 


급격한 산업화와 함께 경제발전에 집중하다 보니, 지켜내지 못한 소중한 우리의 전통이 정말 많은데요. 문재인 대통령은 이번 방문에서 "전통문화가 우리의 경쟁력입니다."라는 문장을 옹기에 직접 새기기도 했습니다. 외고산 옹기 마을이 전통과 현대를 멋지게 조화시킨 좋은 선례가 되어주었으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