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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이병철 회장이 교보문고 개장하는 날 

연신 고맙다고 외친 이유

1년에 몇 권 정도의 책을 읽으시나요? 2019년이 밝으면서 새해 다짐 목록에 '독서'를 넣으신 분들도 많을 텐데요. 유튜브, 넷플릭스 등 다양해진 볼거리에도 불구하고, 출판과 책에 대한 관심은 전에 없이 뜨겁습니다.'1인 1책 시대'라는 말이 나올 만큼 자기 책을 쓰는 일반인도 늘어났고, 여기저기에 대형 서점과 화려한 도서관이 생겼죠. 책을 사기 위해서 꼭 밖으로 나가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대형 온라인 서점에 접속하면 해외 서적까지 포함한 모든 종류의 책을 한나절 만에 받아볼 수 있으니까요. 


출처: 동원그룹 블로그

하지만 책에 대한 접근성이 이렇게 좋아진 건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닙니다. 1907년 문을 연 종로 서적을 제외하면, 80년대까지만 해도 대한민국에는 대형서점이랄 게 없었으니까요. 동네 앞 서점의 큐레이션이 내가 읽을 수 있는 책의 전부이기도 했었죠. 그만큼 1981년 광화문에 처음으로 문을 연 교보문고가 한국의 도서업계에 끼친 영향은 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교보문고는 보험 업체인 교보생명그룹의 계열사인데요. 보험회사에서 종로 한복판에 대형서점을 연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대한민국 대표 대형서점


출처: 주간조선

교보문고는 1980년 12월에 대한 교육보험의 자회사로 설립되어, 이듬해인 1981년 6월 1일, 광화문에 처음으로 오픈합니다. 지금이야 교보생명은 몰라도 교보문고는 다들 알 정도로 성공한 서점이지만, 설립 당시에는 임직원 모두가 고 신용호 회장을 무척이나 만류했다고 하는데요. 광화문 사거리 금싸라기 땅에 돈도 얼마 안 되는 서점을 차리겠다는 계획이 무모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출처: 경향신문

하지만 수익성이 낮을 거라는 예상을 깨고, 교보문고는 창립 5년 만에 손익분기점을 넘어섭니다. 1994년에는 대전점에 이어 성남점을 오픈하고, 2003년에는 국내 최대 규모인 강남점도 오픈하죠. 바로드림센터와 교내 서점까지 포함하면 현재 전국의 교보문고 지점은 42개에 달합니다. 1997년에는 '인터넷 교보문고'로 온라인 판매도 시작하는데요. 원격 통신 판매가 그때 처음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1989년에 이미 온라인 정보 시스템(천리안)을 통해 통신판매 제도를 도입했기 때문이죠. 


서점의 규모와 접근성, 방대한 도서 양과 편리한 도서 분류 방식으로 교보문고는 꾸준히 고객의 사랑을 받습니다. 작년 8월 교보문고 북클럽 회원은 1600만 명을 넘어섰고, '한국 산업의 고객만족도 조사'에서 22년 연속 대형서점 부문 1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인구를 5000명이라고 생각했을 때, 국민 3.1명 당 1명은 교보문고 회원이라는 계산이 나오네요. 


독립운동가의 후예


출처: 주간 조선 / 대산 신용호 기념사업회

결과가 좋으니 다 좋은 거 같긴 한데, 애초에 신용호 회장이 왜 비싼 땅에 교보문고를 만들려고 했는지, 서점 사업의 성공을 미리 내다봤던 것인지가 궁금해집니다. 사실 신용호 회장은  교보문고의 수익성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는 "돈은 교보생명으로 벌고 사회 환원은 서점으로 하겠다"는 의지가 확고했습니다. 심지어 그는 생전에 "연 500억 원 정도의 적자는 내도 괜찮다"라고 말하기까지 했다네요.


출처: 주간 조선 / 대산 신용호 기념사업회

사업가인 그가 적자를 감수하면서까지 대형 서점을 설립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독립운동가 집안에서 태어난 신 회장은 몸이 약해서 초등학교에도 다니지 못합니다. 대신 책으로 배움에 대한 갈증을 채웠죠. 민족사업가로 활동하던 그는, 6·25 이후 피폐한 조국의 현실을 안타까워 했는데요. 우수한 인적자원만이 국가의 희망이라는 생각에 교육보험 제도를 창안하고, 본격적인 보험사업에 뛰어듭니다. 시작은 그리 화려하지 않았지만 높은 교육열과 맞물려 교육보험이 인기를 얻으면서 '대한 교육보험'은 창립 9년 만에 업계 정상에 오르게 되죠. 


출처: 주간조선

하지만 교육에 대한 그의 열정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는 일본에 갈 때마다 사람들로 꽉 찬 대형서점을 보고 부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고 하는데요. '젊은이로 꽉 찬 서점이 나라의 진정한 미래'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신 회장의 견해를 함께 나눈 지인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삼성그룹의 창립자 고 이병철 회장이었죠. 두 사람은 서울 종로에 새 건물을 올리면 꼭 큰 서점을 열자고 다짐했고, 신 회장이 먼저 그 약속을 지켜 교보문고가 탄생한 겁니다. 교보문고가 처음으로 문을 열던 날, 이병철 회장은 신용호 회장의 손을 붙잡고 연신 고맙다는 말을 했다네요. 


책보다 사람이 먼저인 경영방침


교육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기에, 신용호 회장의 서점 경영방침도 여타 기업인들과는 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고객이 책을 사지 않고 한곳에 서서 오래 읽거나 노트에 책 내용을 베끼더라도 절대 눈치를 주지 않도록 직원들을 교육했다는 이야기는 이미 유명하죠. 심지어 책을 훔치려는 사람이 있어도 여러 사람 앞에서 망신을 주지 말고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타이르라는 지침까지 내리죠. '한 권이라도 더 팔자'보다는 '한 권이라도 더 읽히자'라는 게 그의 목표였음이 여실히 드러납니다. 


출처: 이데일리

광화문 사거리 교보 생명 건물은 지나다니는 사람의 눈길을 끕니다. 유명 시인들의 가슴을 울리는 시구들이 내걸리는 '글판'의 존재 때문이죠. 이 글판은 신용호 회장의 제안으로 1991년에 시작되는데요. 처음에는 불법 광고물로 간주되어 벌금을 무는 해프닝을 겪기도 했답니다.


이 글판이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IMF 즈음입니다. 많은 국민들이 절망과 고통에 빠져있을 무렵, 신 회장은 시민들에게 위안을 줄 수 있는 감성적인 문구로 글판을 채우기로 결정하죠.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라는 문장, 어디서 봤는지는 몰라도 왠지 익숙하시죠? 이 역시 2012년 봄에 교보문고 글판에 내걸린 나태주 시인의 '풀꽃'의 일부입니다. 일상에 치여 여유 없는 걸음을 걷는 종로 거리의 사람들에게, 광화문 글판은 오래도록 힘이 되어주고 있습니다. 


불황에도 고수하는 교보의 신념


출처: 한국경제

물론 경영방침이 이렇다 보니, 이익이 많이 나는 사업이 되기는 힘듭니다. 연 4천만 권 가량의 도서를 판매하며 서점업계 독보적 1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매출 규모는 눈에 띄는 확실한 성장은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성장 부진에 대해, 교보가 온라인 시장에서의 기선제압에 실패한 것이 원인이라는 평이 많은데요. 도서정가제가 이루어지기 전인 2000년대 초, 인터넷 서점들은 30~40%씩 할인 판매를 하며 가격경쟁에 돌입했지만, 교보문고는 이에 참여하지 않습니다. 점유율을 높이려고 업계 전체에 피해를 주는 출혈경쟁을 하지는 않겠다는 윤리적 판단 때문이었죠. 


출처: 파이낸셜 뉴스 / 동아일보

매출이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데도 교보문고의 경영방침은 크게 변화하지 않습니다. 2015년, 교보문고는 아예 매장 내에 테이블과 의자를 설치하기 시작합니다. 방문객들이 편안하게 머무르며 책을 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죠. 고객들이 책을 서점에서 다 읽고 가면 판매량은 오히려 줄어들 텐데 이런 결정을 내렸다는 것이 조금 의아하게 느껴지기도 하는데요. 


출처: 한겨레 / 이데일리

서점 내에 책 읽는 공간을 마련한 이유에 대해 질문하자, 교보문고 관계자는 "고객이 오기만을 기다리기보다 매력적인 공간을 만들자는 취지에서 도입했다'는 대답을 내놓았습니다. 이런 정책은 실제로 효과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의자와 테이블을 설치한 지 1년 후인 2016년에는 잘 오르지 않던 매출이 반등을 시작했으니까요. 


다만, 이 정책이 실시된 이후 출판업계에서는 원성이 자자합니다. 매장에서 책을 읽고 사 가지 않으니, 손때묻은 책 반품 등의 피해가 발생한다는 것이죠. 서점은 도서관이 아니라는 그들의 주장에도 일리가 있어 보이는데요. 이에 교보문고는 장기적으로 봤을 때 독서인구가 늘어나 출판업계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 신용호 회장이 교보문고를 설립하면서 남긴 말입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에 적자를 각오면서까지 서점을 열고, 책 판매보다 사람을 우선하는 교보문고의 문화를 만들어 나갈 수 있었겠죠. 창립주의 책·교육 사랑이 그대로 전해진 것인지, 교보문고는 임직원 전부가 책과 서점업을 사랑하는 것으로도 유명한데요. 하루하루 달라지는 업계 상황에도 교보문고가 굳건히 그 자리를 지켜주리라 믿는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