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불단행. 불행은 홀로 오지 않는다는 의미의 사자성어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며 누구나 한 번쯤 겪는 힘든 시기가 있죠. 보통은 '슬럼프'로 표현되는 이 시기는 개개인마다 차이가 있습니다. 짧게 슬럼프를 극복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계속되는 불행에 오랜 시간을 아파하는 이가 있죠.
개그계를 주름잡았던 이 개그우먼 역시 그 기간이 유난히 길어 모두의 안타까움을 자아냈습니다. 그럼에도 꿋꿋이 생계를 위해 도전을 멈추지 않았고 최근 깜짝 놀랄만한 반전 근황을 공개했는데요. 대체 누구일까요?
본래 꿈은 판사, 개그우먼 택한 진짜 이유
바로 개그우먼 이경애가 그 주인공입니다. 이경애는 불우한 과거사를 갖고 있는데요. 그녀의 본래 꿈은 공부를 해 훌륭한 판사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사회사업가까지 가는 걸 구상했죠. 하지만 학비가 없어 중학교에 입학하지 못했는데요. 14살 당시 그녀가 수세미를 직접 팔아야 할 정도로 형편이 좋지 않았죠. 아버지는 약주와 놀음을 좋아해 어머니가 생활비를 벌어 여섯 식구의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어린 시절 빚쟁이가 자주 집에 들이닥쳤고 가세가 더욱 기울었는데요. 그녀의 어머니는 정신이상이 생겨 극단적인 선택까지 할 정도로 힘든 상황이었다고 해요. 그녀는 1년간 쉬며 가정 형편 상 공부보단 돈을 많이 버는 연예인으로 진로를 변경해야겠단 생각을 갖게 됩니다. 이후 웅변, 연극반 활동 등을 통해 연예인 데뷔 준비를 시작했죠. 고등학교 졸업 후 20 세가 되던 해에 '제2회 KBS 개그콘테스트'로 화려하게 데뷔에 성공했습니다.
유행어 하나로 광고 20편, '유행어 제조기'
이후 '유머일번지', '쇼비디오자키' 등에 출연하면서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90년대 초반~중반까지 각종 시상식을 휩쓸었죠. 광고료로 CF 1편에 3천만 원을 벌어들일 만큼 인기가 대단했는데요. 특히 "넌 내 거야 인마", "너는 내 밥이야" 등의 유행어를 터트리며 유행어 제조기라고 불렸습니다. 그녀는 유행어 하나로 20개의 광고를 찍었고 한 달 수입이 1억에 달해 어머니에게 집을 사드렸다는 일화를 공개하기도 했죠.
나이트 사업 실패, 현금 3억 날려
그녀에게 찾아온 행복은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 목돈을 벌기 위해 투자한 나이트클럽 사업이 실패에 접어들면서 암흑기가 찾아왔죠. 그녀는 "언니까지 결혼시키고 식구 다 챙기고 봉사를 해야겠다는 시점에 투자를 통해 돈을 날렸다. 그동안 벌었던 돈, 집을 다 날렸다."라며 당시를 회상했는데요. 그녀는 당시 현금 3억, 현재 10억 가량이 되는 돈을 날렸습니다. 하루아침에 빚더미에 앉으며 부모님 전세금 5,000만 원을 남겨두고 끝나버렸죠. 게다가 건강이 좋지 않은 부모님의 병원비까지 부담하며 이경애는 스스로를 원망해야 했습니다.
파혼, 사별로 우울증... 시신 닦이 알바까지
1990년 이경애는 동네 1살 오빠였던 한 남성과 결혼에 골인했는데요. 얼마 지나지 않아 이혼을 택했습니다. 이혼 당시 동료들은 위로보단 비난을 던졌고 힘든 시간을 견뎌야 했죠. 그러다 1997년 카페에서 12살 연상의 김용선을 만나게 됩니다. 우연한 만남에 합석을 하게 됐고 둘은 모두 이혼 경력이 있어 금방 가까워지게 되었죠.
중간에 그녀는 어머니의 소원이었던 대학 입학을 위해 35세에 고등학교를 찾았습니다. 대입을 준비해 36세의 나이에 동덕여자대학교 방송연예학과 99학번 수석으로 입학에 성공했죠. 이후 2002년 김용선과 재혼에 성공합니다. 이경애는 불임이었지만 인공수정으로 간신히 성공하여 딸 김희서 양을 낳게 되었죠.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교통사고로 크게 다쳐 입원을 하게 됐는데요. 그녀의 곁엔 남편 김용선이 정성스러운 간호와 함께 있었습니다.
김용선은 과거 간경화로 큰 아들에게 간 이식을 받았던 적이 있는데요. 이경애를 간호하다 결국 간이 급속도로 나빠져 쓰러졌습니다. 이경애는 재활치료도 포기하고 남편과 본인 병원비를 벌기 위해 일을 나가기 시작했죠. 몸 오른쪽 마비 증상을 겪을 만큼 일을 했다고 해요. 당시 아버지, 어머니 역시 간경화, 위암을 선고받아 수년간 병간호를 함께 해야 했죠. 이경애의 극진한 간병으로 김용선은 어느 정도 회복을 하였지만 2013년, 신부전증으로 결국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남편과의 사별 이후 극단적인 시도도 수차례 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곁에 남은 딸 희서 양을 위해 이경애는 무너질 수 없었죠. 세차장, 병원에서 시신을 닦아주는 아르바이트 등 생계를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했습니다. 특히 시신을 닦아주는 아르바이트는 하루 일당 7만 원이라는 소리에 '이 집안의 가장은 나다'라는 생각을 했다며 당시 안 해본 일이 없다고 전했죠.
어묵 사업으로 재기 성공, 사업가로 변신
힘든 시간을 이겨낸 그녀에게도 희망이 생겼습니다. 2012년부터 시작한 어묵 사업이 대박 나며 2015년부터는 억대 수입을 올릴 수 있었는데요. 그녀는 홍보를 위해 홈쇼핑 방송, 광고 등을 할 수 있었지만 맛으로 승부를 보겠다는 생각에 일절 진행하지 않았다고 해요. 서울시 마포구, 경기도 남양주시, 인천 남동구 등에 떡볶이 가게까지 오픈하는 데에 성공했죠.
현재 이경애는 수제어묵 떡볶이 가게로 승승장구를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그녀는 재기의 비결을 하나뿐인 딸 희서 양이라고 밝혔는데요. 최근 한 방송에 출연해 코로나19 여파로 운영하던 식당이 문을 닫았었단 사실을 공개하기도 했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책임감 하나로 스스로를 다시 빛나게 만든 이경애의 앞으로가 더욱 궁금해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