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ww.smartincome.com

연말의 파리 백화점에서 

윈도쇼핑만으로 즐거워지는 비결

이제 서울의 거리는 하나둘 연말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12월 8일부터 청계천에서는 크리스마스 페스티벌이 열리고 있고 서울시청, 영등포 타임스퀘어, 가로수길 등 사람들이 몰려드는 번화가에는 커다랗고 아름다운 트리가 속속 설치되겠죠. 저는 여행, 어학연수, 유학 기간을 통틀어 총 네 번 정도의 크리스마스를 프랑스에서 보냈는데요. 이맘때가 되면 연말의 프랑스에 떠돌던 특유의 분위기가 떠오르곤 합니다.


유학생에게는 외로운 계절


프랑스의 크리스마스라니, 당연히 한국에서랑은 비교도 안되게 멋질 줄 알았죠. 하지만 프랑스에 대해 가졌던 모든 막연한 환상이 그랬듯, 이런 기대도 곧 산산조각 나고 맙니다. 12월의 프랑스, 예쁘지 않냐고요? 예쁩니다. 한국의 연말처럼 흥청망청 신나는 분위기 아니냐고요? 신나는 분위깁니다. 그래서 외로움이 더욱 뼈저리게 느껴지죠. 프랑스의 겨울은 기껏해야  영하 1~2도 정도로, 한국의 겨울보다는 기온이 훨씬 높지만 비가 자주 오고 어두워 뼛속까지 으슬으슬해요. 누가 톡 건드리기만 해도 눈물이 날 것 같고, 온돌방이 없으니 등과 어깨가 한없이 움츠러들죠. 


그런데 거리에 나가보면 사람들은 나 빼고 다 즐거워 보입니다. 프랑스 역시 다른 서양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크리스마스를 가족과 함께 보내는데요. 가족 구성원 모두에게 선물을 해야 하기 때문에 다들 두 볼이 빨갛게 상기된 채로 각종 쇼핑백을 한 아름씩 들고 다닙니다. 크리스마스가 정말 가까워 오면 친구들은 모두 가족을 만나러 고향으로 돌아가고요. 프랑스인 친구들뿐 아니라 유럽권의 모든 학생들이 집으로 돌아가죠. 기숙사에는 비 유럽권 학생 몇몇 만이 남습니다. 크리스마스 당일은 한국의 설날, 추석 당일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거리는 휑하고, 여는 가게도 몇 없고요. 그러니까 자연히 이런 생각을 하게 되죠. 엄마가 보고 싶어. 나도 선물 사들고 가족들을 만나러 가고 싶어!


그래도 예쁜 건 예쁜 거니까 


그렇다고 기숙사 방에서 우울하게 연말을 다 흘려보낼 수는 없잖아요. 프랑스의 작가 빅토르 위고가 "젊은 시절 운 좋게도 파리에 살아볼 기회가 있었다면, 당신이 사는 동안 어딜 가든 파리는 움직이는 축제로서 함께할 것이다"라는 말을 했거든요. 그래서 저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집 밖으로 나섰습니다. 지금 하는 경험들이 평생 동안 저를 즐겁게 따라다닐 수 있도록요.


연말의 파리는 정말 예쁘긴 합니다. 좁은 골목에도 건물과 건물 사이를 예쁜 전구들이 장식하고 있고요. 크리스마스 마켓에서 파는 뱅쇼와 달콤한 간식들도 저를 홀렸죠. 시청 건물은 꼬마전구로 화려하게 변신하고, 그 앞에는 널찍한 스케이트장도 생겨요. 하지만 연말 파리의 백미는 따로 있습니다. 바로 3대 백화점에서 경쟁하듯 선보이는 쇼윈도 장식이죠.


쇼핑의 성지들


지금은 뉴욕에게 많은 지분을 넘겨주었지만, 그래도 파리는 많은 패션 디자이너들이 영감의 원천이자 세련됨의 상징으로 생각하는 패션의 도시입니다. 파리에 들르면서 쇼핑을 일정에 넣지 않는 분들은 거의 없을 거예요. 관광객과 현지인 모두에게 고루 사랑받는 파리의 대표적인 백화점은 크게 세 군데를 꼽을 수 있습니다. 


갤러리 라파예트는 아마 모두들 아실 거예요. 오페라 역에서 조금만 걸어가면 되는, 가장 유명하고 가장 사람이 많은 백화점이죠. 특히 일층부터 맨 위의 돔까지 시원하게 뻥 뚫린 중앙 공간이 압도적인데요. 남성관과 여성관이 아예 분리되어 있을 만큼 큰 규모를 자랑하는 라파예트는 취급하는 품목도 다양해 여기저기 다니며 쇼핑할 시간이 넉넉지 않은 여행자들이 좋아합니다. 


쇼핑할 생각이 없더라도 라파예트의 메인 건물은 들러볼만해요. 백화점 옥상이 파리의 숨겨진 뷰포인트거든요. 입장료도 없고, 파리의 주요 건물들이 전부 보이니까, 저는 돈 주고 한참 줄 서서 올라간 에펠탑보다 훨씬 좋았습니다.


라파예트에서 5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에 위치한 프랭땅 백화점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라파예트보다 규모는 작은 편이지만 물건이 적진 않아요. 한 블록 차이인데 관광객이 적어 라파예트보다 덜 붐비기도 하고요. 너무 화려하고 복잡한 라파예트에 지치신 분이라면 가보실 만합니다. 아, 여기도 라파예트처럼 옥상 테라스가 있다고 하네요. 저는 올라가 보지 못했지만요.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백화점이 파리에 있다는 것, 여러분은 알고 계셨나요? 1838년 세워진 봉마르셰 백화점은 최초의 백화점이자 파리에서 가장 럭셔리한 백화점인데요. 여기서 원하는 만큼 쇼핑을 하실 생각이라면 생각보다 두둑한 예산을 세우셔야 할 거예요. 프랑스어로 '봉 마르셰 (bon marché)'는 저렴한 가격을 뜻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파리에서 가장 고급진 브랜드들은 다 봉마르셰에 모여 있으니까요. 


다양한 식재료와 음식에 관심이 많은 분이라면, 절대 이 백화점의 식품관을 지나치셔서는 안됩니다. 전 세계와 프랑스 각지에서 모여든 각종 식료품들을 한자리에서 구경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거든요. 패키지가 예쁜 제품이 많아서 선물하기에도 좋고요. 참, 봉마르셰의 식품관은 백화점 본관과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독립되어 있으니, 헷갈리지 마세요. 지도에는 '라 그랑드 에피스리 드 파리(La Grande Epicerie de Paris)'라고 검색하시면 됩니다.


3D 버전의 동화책 한 페이지


너무 멀리 돌아왔네요. 원래는 파리 백화점들의 연말 쇼윈도 장식에 대해 얘기하려고 했었죠. 아 뭐 연말에 다 백화점에 장식하고 그러는 거 아니냐,  커다란 선물 박스 모형 몇 개 가져다 놓고, 반짝이는 전구 좀 달고 그럼 되는 거 아니냐,라고 생각하셨다면 오산입니다. 


프랭땅 백화점에서 처음 시작한 이 쇼윈도 꾸미기는 매년 다른 주제로 구성되는 '하나의 세계'입니다. 쇼윈도 하나를 지나칠 때마다 3D로 만들어진 동화책 한 페이지를 넘기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하고요. 섬세하게 제작된 인형들이 몽환적인 음악이나 효과음에 맞춰 움직이거든요. 백화점 입장에서도 꽤나 큰 연례행사라 처음으로 쇼윈도를 공개하는 날은 유명인사를 초청해 작은 파티도 연답니다. 말로 이렇게 길게 해서 뭐 하겠어요. 보여드립니다. 2018년의 3대 백화점 쇼윈도 장식. 


갤러리 라파예트

갤러리 라파예트의 연말 쇼윈도는 늘 특별했지만, 올해는 조금 더 특별합니다. 쇼윈도를 가득 채운 움직이는 인형들을 디자인한 게 바로 어린이들이기 때문이죠. 올해 초 라파예트에서 공모전을 열어, 5살에서 11살까지의 어린이들이 자신들의 크리스마스 영웅을 스케치해 보냈는데요. 


출처: milk magazine

뽑힌 그림들은 11개의 인형으로 재탄생해 선물 공장, 산타 마을, 연말 저녁식사 등을 콘셉트로 한 공간에서 귀여움을 뽐내게 되었습니다. 어린이들이 디자인한 인형들이라 그런지, 모두 개성이 넘쳐 미소를 짓게 만드네요. 


프랭땅

프랭땅도 빼놓을 수 없겠죠. 올해 프랭땅에서는 ‘비올레뜨와 쥘’이라는 두 어린이가 산타 할아버지를 찾아가는 여정을 소재로 삼았습니다. 이 두 아이는 은빛 곰들이 나타나는 서리 내린  골짜기, 양으로 가득한 금빛 모래 언덕, 과자로 지은 집들이 있는 환상의 나라를 지나치는데요


‘어린 시절의 분위기’라는 이번 테마는 화가 마리 로르 크뤼쉬와 마리오네트 예술가 장 클로드 드익스의 손끝에서 탄생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이번 작업을 위해 무려 75개의 마리오네트를 제작했다네요. 


봉마르셰

봉마르셰의 올해 테마는 '크리스마스트리에 대한 오마주'입니다. 아니 연말 쇼윈도 장식 테마가 트리라니, 너무 뻔한 거 아니냐고요? 그렇지가 않습니다. 봉마르셰의 표현에 따르면 '겨울철 거실의 영웅'이자 '연말의 군주'인 트리들은 백화점 쇼윈도 안에서 살아 움직일 것 같은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백조의 호수의 백조 같은 모습도, 병정 차림의 호두까기 인형 같은 모습도 인상적인데요. 물랭루주의 무희 같은 트리들도 있습니다. 깃털 대신 전나무 가지로 치장한 모습이 웃음을 자아내죠.


봉마르셰의 내부 역시 트리로 힘을 줬네요. 봉마르셰, 하면 딱 떠오르는  상징적인 에스컬레이터 전경의 앞뒤로 매달려 있는 트리들이 백화점이 아니라 화려한 연말 공연의 한 장면에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11월 초반에 시작한 이 사랑스러운 쇼윈도 전시들은 1월 초까지 계속됩니다. 라파예트는 1월 2일, 봉마르셰는 1월 1일, 프랭땅은 1월 6일까지라고 하는데요. 그때까지 파리에 머무는 분들은 꼭 시간을 내어 방문해보세요. 아빠 엄마의 긴 쇼핑에 지루해진 어린이를 동반한 가족이라면 더더욱 추천합니다. 혹시 몇 년전의 저처럼 흥청대는 연말 분위기에 더 울적하고 외로워진 유학생분들이 계시다면, 그분들께도 강력하게 권해드려요. 쇼핑하지 않아도 즐거워질 수 있고, 입장료를 내지 않고도 내로라하는 아티스트들의 작업을 볼 수 있는 기회잖아요. 추운 겨울엔 우리 모두 마음속에 동화 한 편씩 필요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