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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속에 술을 마셔?

프랑스의 식전주 문화 


한 잔 하러 갈래?


프랑스 어학연수 시절, 오후 수업을 마치고 기숙사로 돌아와 쇼파에 뻗어 있는데 누군가 방 문을 두드렸습니다. 문을 열어보니 같은 층에 사는 친구가 서 있었죠. 그녀는 대뜸 '한 잔 마시러 가자'고 했는데요. 때는 저녁 6시쯤. 여름이라 해도 저물기 전이었고, 공강시간에 샌드위치로 간단히 점심을 때운 저는 배가 고팠습니다. 그런데 밥도 안 먹고 바로 술을 마시러 간다고? 아니 그래도 돼?


빈 속에 술마시면 안되는 거 아니야?


출처: KNN 뉴스

저는 어릴 적부터 '빈 속에 술마시면 안된다'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습니다. 저뿐 아니라 거의 모든 한국인들이 그렇겠죠. 빈 속에 술을 마시면 빨리 취하고 위에도 좋지 않으니 반드시 밥을 먹고 술을 먹든지, 푸짐한 안주를 곁들여 먹어야 한다고요. 한 끼만 먹는 것도 아니죠. 3차를 가든 4차를 가든 안주를 계속 시키니까요. 그런 저에게 식전부터 술을 마시러 가자고 하니, 정말 그래도 되는지 의아했습니다.


출처: 인스타그램 @solo_alcohol_coffee


누가 취하도록 마시쟤?


출처: Moncoeur Belleville

제가 빈속이라며 주저하자 친구는 웃기 시작했습니다. 원래 프랑스에서는 저녁 먹기 전에 간단히 한 잔 마신다면서요. 독한 술을 마시는 것도 아니고  땅콩이나 올리브 같은 기본 안주는 준다고, 걱정하지 말랍니다.


이런 문화가 있는 이유를 묻자 그녀는 가벼운 술 한잔으로 위를 자극해 식욕을 돋워주려는 목적이라고 했습니다. 거창하게 밥 사먹기 뭐할때 친구들끼리 수다 떨며 놀려는 핑계기도 하고요. 그리고 이 식전주 그리고 식전주 문화를 아우르는 이름도 있었습니다. '아페리티프(apéritif)' 혹은 줄여서 '아페로(apéro)' 라고 부르죠. 


그래서 뭘 마실 건데?


아페리티프로 뭘 마실지는 본인 마음입니다. 생맥주를 먹어도 되고 와인이나 샴페인을 마셔도 되죠. 와인을 마실 경우 무거운 레드 와인보다는 상큼한 화이트 와인이나 로제를 많이 마십니다. 


칵테일을 마시는 경우도 있는데요. 칵테일 종류 중 프랑스에서 식전주로 애용하는 대표 메뉴는 '키르(kir)' 입니다. 검고 작은 카시스 열매로 만든 리큐어, 크렘 드 카시스에 화이트 와인을 더해 마시는 간단한 칵테일인데요. 키르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 하고 싶다면 화이트 와인을 샴페인으로 대체하면 됩니다. 그럼 '키르 루아얄 (kir royal)'이 되죠. 


와인보단 맥주파인 분들은 '파나셰(panaché)를 주문하면 됩니다. 맥주와 레모네이드를 섞은 이 술은 시원하면서도 상큼해 특히 여름철에 사랑받죠. 아예 맥주와 레모네이드를 섞어 놓은 완제품 병맥주가 나올 정도니까요. 아, 스페인 여행을 해보신 분들이라면  레몬 맥주인 '클라라'와 비슷하다고 생각하시면 될 겁니다. 


술을 못마신다고요? 혹은 미성년자? 그렇다고 친구들이 모이는 아페로 자리에 빠질 필요는 없습니다. 알코올이 들어가지 않은 버진 칵테일을 마셔도 되고, 프랑스 사람들이 즐겨마시는 시럽 음료를 마셔도 되죠. 여름에 프랑스 거리를 걷다보면 테라스에 앉아 정체 불명의 초록색 물을 마시는 사람들을 볼 수 있는데요. 그게 바로 물에 민트 시럽을 탄 음료입니다. 


안주는 뭐 먹어?


출처: Grazia

프랑스 사람들이라고 식전에 깡술을 마시진 않겠죠. 다만 곁들이는 음식은 한국 안주에 비하면 매우 간단합니다. 카페에서 마신다면, 안주를 따로 주문하지 않았을 경우 땅콩이나 프레첼 과자, 감자칩이나 올리브 등 기본 안주 중 하나가 나오죠. 주문해서 먹을 수 있는 안주로는 햄, 소시지 등의 돼지고기 가공육을 통틀어 이르는 샤퀴트리(charcuterie)나 치즈 플레이트 정도가 있겠네요. 


출처: BergHOFF Worldwide

집으로 친구들을 초대해 아페로를 대접하는 경우도 있는데요. 이 경우에는 길게 자른 채소스틱이나 카나페 등 안주메뉴가 조금 다양해지기도 합니다. 플레인 비스킷에 고기를 갈아 만든 파테(pâté)를 발라서 내기도 하고요. 마트에 가면 아페로 용으로 미리 잘라 놓은 다양한 맛의 치즈나 과자 등도 구입할 수 있습니다. 귀찮을 땐 완제품이 최고죠 뭐. 


한 잔만 천천히!


빈 속에 술을 많이 마시면 빨리 취하는 것도 사실, 건강에 좋지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아페로는 식욕과 대화의 흥을 돋워주는 수단일 뿐이지, 취하도록 연거푸 마시기 위한 문화는 아니에요. 식전주를 여러잔 마시고 속이 안좋아져 저녁 식사를 못해서는 안되겠죠. 되도록이면 딱 한 잔만, 음미하며 천천히 마셔보세요. 식사에 곁들일 와인도 우리를 기다리고 있으니, 한 잔이라고 서운해하지 않으셔도 된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