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처럼 예능에도 트렌드가 있습니다. 최근 몇 년간 히트하는 예능의 주제는 미식이나 여행에 집중되고 있죠. 반면 지금으로부터 20여년 전, 그러니까 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에는 공익성을 띤 예능 프로그램들이 인기를 얻었는데요. '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한 코너였던 '러브하우스'는 열악한 환경에 주거하는 가족들을 위해 집을 고쳐주었고, '느낌표'의 '책,책,책 책을 읽읍시다!'는 전국민을 독서 열풍으로 몰아넣었죠.
출처-MBC 느낌표
이들의 선배격 코너라고 할 수 있는 일밤의 '이경규가 간다'는 정지선을 잘 지킨 운전자에게 냉장고를 선물하는 내용으로, 전국적인 반응을 이끌어내며 화제가 되었는데요. 자칫 지루할 수 있을 것 같은 이 프로그램이 이토록 히트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요?
모두가 반대했던 프로그램
출처- KBS 슈퍼선데이
'이경규가 간다'가 탄생하기 전, 일밤의 시청률은 2%대에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케이블이 지금처럼 활성화 되지 않았던 당시에 지상파 방송사 프로그램의 시청률이 2%라는 건, 현재의 소수점 시청률과 견줄만큼 낮은 수준이었죠. 동시간대 KBS가 방영하던 '슈퍼선데이'의 시청률은 40%. MBC로서는 판을 뒤엎기 위한 강력한 한 방이 필요한 시기였습니다.
계속되는 회의로 모두가 지쳐가던 어느날, 새벽 퇴근을 하던 김영희 PD는 횡단보도에서 반짝이는 초록색 신호등을 마주칩니다. 평소처럼 뛰어서 건너지 않고 다음 신호까지 기다리자 이상하게도 기분이 굉장히 좋아졌다는데요. 이 경험을 통해 그는 '교통법규 준수'에 관한 프로그램을 만들기로 마음 먹습니다.
출처-MBC 무릎팍도사
하지만 동료들을 설득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정지선을 철저하게 지키는 차에게 냉장고를 선물하겠다' 는 김 PD의 발상에 스태프들은 모두 고개를 저었죠. 밤이나 새벽에 촬영해야하니 화면도 어두울 것이고, 인기 연예인이 나와도 부족할 판에 자동차가 주인공인 프로그램이라니 성공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한 겁니다.
첫 당첨자는 바로...
출처-MBC 일밤
동료들의 의견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김영희 PD는 '이 프로그램이 시청자들을 기쁘게 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기에 촬영을 감행합니다. 스태프들을 겨우 설득하고 이경규를 섭외해 현장으로 나간 김PD의 속은 시간이 갈수록 바짝바짝 타들어갔는데요. 정지선을 지키는 운전자는커녕, 도로 위에 나타나는 차량도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가뭄에 콩나듯 등장하는 차량들마저 계속 신호를 위반하자, 더이상 가망이 없다고 생각한 MC 이경규와 민용태 교수는 PD가 없는 사이를 틈타 클로징 멘트까지 촬영합니다. 밤샘에 지친 스태프들도 철수하고 싶어하는 기색이 역력했죠. 그런데 새벽 4시경, 도로 위로 경차 한대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다른 차들이 신호와 정지선을 무시하고 달려가는 동안 이 차의 운전자는 멈춰 서 신호가 바뀔때까지 기다리죠.
출처-MBC 일밤
감격에 겨워 차량쪽으로 향한 김영희 PD는 잠시 당황합니다. 운전자의 얼굴이 일그러져 있어 음주운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인데요. 그 순간 김PD의 눈에 자동차 앞유리의 장애인 스티커가 눈에 들어옵니다. 첫번째 양심 운전자는 뇌성마비를 가진 분이었던 것이죠. 양심냉장고의 첫 주인공이 된 운전자에게 "왜 신호를 지켰냐"고 묻자 돌아온 대답은 "내가 늘 지켜요"였습니다.
양심냉장고를 둘러싼 에피소드들
출처-MBC 무릎팍 도사
프로그램이 인기를 얻기 시작한 뒤로는 웃지못할 사건들도 많이 생깁니다. 미리 촬영장소와 시간에 대한 공지를 하는 경우 냉장고를 타기 위해 일부러 차를 끌고 나오는 사람들까지 나타났죠. 도로의 모든 차선에서 정지선을 지켜야 냉장고가 지급되기에, 이들은 팀을 짜서 단체로 횡단보도 앞에 등장합니다. 계획과 달리 팀에 속하지 않은 차량이 한 차선에 들어와 정지선을 밟아버리자, 팀원 중 한 사람은 차에서 내린 뒤 해당 차량에 뒤로 물러서라는 손짓까지 하는데요. 이런 장면은 모두 고스란히 전파를 탔고, 해당 회차는 당첨자 없이 마무리 되었죠.
이렇게 양심 냉장고를 노리는 비양심 운전자들이 등장하자, 제작진은 정지선을 지키는 차량들 중 일부를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영동대로에서 촬영이 이루어지던 날에는 배송업체 차량 한 대를 '양심냉장고를 노리는 차량'이라고 오해했다가 차후에 정정방송을 내보내는 일도 있었죠.
출처-KBS 나를 돌아봐
'이경규가 간다'는 진행자 이경규의 준법정신을 알아보기 위해 출근하는 이경규의 차량을 몰래 뒤쫓는 에피소드도 방송합니다. 이경규 씨는 정지선 지키기 전도사 답게 신호와 정지선은 잘 지켰지만 방향지시등 켜는 걸 자꾸 잊어 '애매한 양심'으로 평가받았다네요.
이 시대의 양심을 찾아서
정지선을 잘 지키는 운전자만 양심 냉장고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경규가 간다'는 어르신 짐 들어드리기, 청소년에게 담배와 주류 팔지 않기 등 다양한 양심을 주제로 방송을 제작했는데요. 어르신의 짐을 들어드려 당첨된 한 대학생은 "(당연한 일이라)이런 일로 상을 받지 않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남겨 시청자들에게 감명을 주기도 했죠.
출처-MBC Every1 PD 이경규가 간다
첫방송이 있었던 1996년으로부터 20년이 흐른 뒤, 이경규 씨는 다시 한번 양심 차량을 찾기 위해 건물 옥상으로 올라갑니다. MBC every1에서 방영하는 <PD 이경규가 간다>를 통해 운전자들의 교통법규 의식이 어느정도 발전했는지 지켜보기 위해서였죠. 안타깝게도 정확히 정지선을 지키는 차량을 발견하기까지는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요.
출처-MBC Every1 PD 이경규가 간다
어렵게 만난 첫 주인공을 놓치고, 재촬영까지 가서야 양심냉장고의 당첨자를 만나 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시민은 20년 전의 양심냉장고 방송이 헛되지 않았음을 알게해주었는데요. "당시 양심냉장고 방송을 보고 정지선을 잘 지켜야겠다고 생각했다"고 인터뷰해 이경규 씨를 기쁘게 해 주었죠.
출처-JTBC 한끼줍쇼
지난해 '한끼줍쇼'촬영을 위해 찾은 삼성동에서 이경규 씨는 '양심냉장고 부심'을 드러냅니다. 테헤란로 위를 달리던 차량들 중 대다수가 정지선을 준수하자 "모두 내가 양심냉장고 진행한 덕분"이라며 자랑해 시청자들의 웃음을 유발했죠. 양심냉장고 코너를 통해 MBC는 시청률 부진을 타개했고, 이경규 씨는 국민 MC로 자리매김합니다.
하지만 이 방송이 거둔 최상의 성과는 20년이 흐른 지금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로 교통법규 준수의 중요성을 국민들의 뇌리에 각인시켰다는 점이겠죠. 지루할 것만 같은 '공익성'과 시청자들을 웃고 울리는 '재미'를 적절히 조화시킨 예능이 가능함을 증명했다는 사실 역시 '양심냉장고'의 공이 아닐까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