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장 드라마에도 그 나름의 매력이 있습니다. 시간이 어디로 흘러갔는지 알 수 없을 만큼 흡인력이 높은 데다, 자극적이고 빠른 전개에 집중하다 보면 현실 세계의 문제는 잠시 잊을 수 있죠.
하지만 오래도록 가슴에 남아, 시간이 지난 뒤에도 다시 꺼내보고 싶어지는 드라마는 아무래도 따로 있습니다. <굿바이 솔로> ,<그들이 사는 세상>, <디어 마이 프렌즈>는 많은 시청자들이 '다시 보고 싶은 작품'으로 꼽는, 대표적인 웰메이드 드라마들인데요. 오늘은 이 작품들을 집필한 노희경 작가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출발부터 웰메이드
출처-경향신문
노희경 작가의 데뷔작은 1996년 방영된 MBC 베스트 극장 <엄마의 치자꽃>입니다. 한 가정의 어머니가 암에 걸려 시한부 인생을 살아간다는 이 드라마의 주제는 단막극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에서 반복되는데요. 다만 어머니와 딸, 단둘로 이루어진 단출한 가족은 4부작 드라마에서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 무심한 의사 남편, 유부남과 사귀는 딸, 재수 중인 아들로 확대되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은 여러 상을 수상합니다. 방송위원회가 선정하는 '이 달의 좋은 프로그램' 수상작 가운데 최우수상, 1997년 백상예술대상의 TV 부문 대상을 거머쥐었을 뿐 아니라 같은 해 MBC 연기 대상의 작가 상도 노희경 작가에게 돌아갔죠. 이는 연속극에 비해 주목을 덜 받는 단막극으로서는 이례적인 일이었는데요. 노 작가가 갓 데뷔한 신인이었음을 고려하면 더욱 대단한 성과입니다.
출처-스포츠 조선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작품성까지 인정받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은 2011년에는 영화로, 2017년에는 드라마로 리메이크됩니다. 2013년 7월 치러진 수능 모의고사 언어영역에서는 대본의 일부가 지문으로 등장하기도 했는데요. 문제를 풀던 수험생들의 눈물을 쏙 뺐다는 후문입니다.
다양한 소재, 하나의 주제
출처-KBS 그들이 사는 세상 / SBS 괜찮아 사랑이야
노희경 작가는 작품에서 다양한 소재를 활용합니다. '그들이 사는 세상'은 방송국에서 드라마를 제작하는 PD들의 세계를, '괜찮아 사랑이야'는 마음의 병을 품고 살아가는 인기 추리소설가와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들의 모습을 그리죠. 연기파 배우들이 대거 출연한 '디어 마이 프렌즈'는 노년의 삶을, 작년에 방송된 <라이브>는 지구대에 근무하는 경찰들의 일상을 조명합니다.
이렇게 다양한 카테고리를 넘나드는 노희경 작가의 작품은 그러나, 크게 보면 하나의 줄기를 형성합니다. 때로는 남녀 간의 정열로, 때로는 가족 간의 애정이나 친구 사이의 우정으로 겉모습만 달라질 뿐 '인간 존재에 대한 따듯한 사랑'이라는 주제가 작품들 전반에 흐르고 있죠.
출처-tvN 라이브
사랑에 대해 말한다고 해서 선한 사람만 등장한다거나, 세상의 고통스러운 모습에 눈을 감지는 않습니다. <그들이 사는 세상>이나 <괜찮아 사랑이야>에 나오는 연인들은 상처받거나 지기 싫어서 가끔 억지를 부리는 평범한 이들이고, <라이브>는 데이트 폭력 등의 무거운 주제를 정면으로 다루기도 합니다. 노희경 작가의 작품이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가닿는 건, 어두운 면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인간을 긍정하고 사랑한다는 것이 느껴지기 때문이겠죠.
명대사 제조기
노희경 작가는 일상적인 대화 사이로 툭툭 치고 나오는 명대사로도 유명합니다.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산다는 건 늘 뒤통수를 맞는 거라고. 이생이란 놈은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어서 절대로 우리가 알게 앞통수를 치는 법은 없다고.(중략) 그러니 별일 아니라고. 하지만 그건 육십 인생을 산 어머니 말씀이고 아직 너무도 젊은 우리는 모든 게 다 별일이다."라는 <그들이 사는 세상> 속 내레이션은 아직도 많은 젊은이들의 마음을 울리고, "진짜 쿨할 수 없단 걸 아는 게 진짜 쿨한 거야'라는 굿바이 솔로 속 영숙(배종옥 분)의 대사는 세상의 많은 '쿨하지 못한 사람들'의 공감을 얻었죠.
출처- instagram @carpediem.hsh / 네이버 블로그 Magazine.8
가슴 깊은 곳을 건드리는 노희경 작가의 명대사들은 <겨울이 가면 봄이 오듯 사랑은 또 온다>는 제목의 책으로도 출판되었는데요. 이 책의 서문에서 노희경 작가는 '대사를 잘 쓰려 애쓰던 서른을 지나고, 말로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고 싶은 사십의 야망을 지나, 이제 오십의 나는 말 없는 드라마를 쓰고 싶다.'고 이야기합니다. 명대사를 '뽑으려' 애쓰지 않아도, 손길 하나, 눈빛 하나로 감정과 스토리가 전달되는 드라마를 쓰고 싶은 그의 마음이 전해지는 듯하네요.
배우의 최상을 이끌어내는 작가
출처-tvN 디어 마이 프렌즈
노희경 작가는 소위 '쪽대본'을 쓰지 않습니다. 미리 읽고 해석해볼 시간을 충분히 주어서인지, 그의 작품에 출연하는 배우들은 연기력 논란에 시달리는 일이 거의 없죠. 다른 작품에서는 미숙한 연기로 질타를 받던 배우들도 노희경 작가의 드라마 안에서는 자신만의 색을 찾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출처-KBS 꽃보다 아름다워 / KBS 굿바이 솔로
항상 연기력보다 미모가 돋보였던 한고은은 '꽃보다 아름다워'에서 이성적이고 깔끔한 캐피털리스트 역할을 훌륭하게 소화했고, 무표정한 얼굴과 내뱉는 듯한 말투로 연기력 논란에 시달리던 김민희는 '굿바이 솔로'이후 생활연기를 자연스러우면서도 독특하게 풀어내는 배우로 평가받고 있죠. 노희경 작가는 고두심, 배종옥, 나문희 등 연기파 배우들을 캐스팅해 극의 중심을 잡으면서, '특유의 느낌을 갖고 있으나 그것이 아직 발현되지 않은' 배우를 찾아내 그 최상을 이끌어내는 능력이 탁월합니다.
"아무리 우리가 아름다운 드라마를 만든다고 해도 지금 살고 있는 이 세상만큼 아름다운 드라마를 만들 수는 없을 거다." <그들이 사는 세상> 속 주준영(송혜교 분)의 말입니다. 20여 년간 쉬지 않고 드라마를 만들어온 작가이기에 쓸 수 있는, 세상에 대한 따듯한 시선이 느껴지는 대사인데요. 노희경 작가가 소속된 '지티스트' 이동규 대표의 말에 따르면 노희경 작가의 차기작은 기획 단계에 있으며, 올 연말쯤 구체화될 예정입니다. 준비에 긴 시간을 투자하는 건 가간 해오던 포맷과 스토리의 틀을 크게 벗어나는 작품이기 때문이라고 하니, 묵묵히 기다려볼 가치가 충분하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