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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국제그룹에 대해 들어보신 적 있나요? 

 

한때 재계 순위 7위에 이름을 올리던 국제그룹은 현재 2030 세대에게는 인지도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기업인데요. 고무신으로 시작한 작은 회사가 21개 계열사를 거느리기까지 걸린 시간은 30여 년이었으나 이 기업이 무너지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하루면 충분했다고 합니다. ‘대기업이 하루아침에 무너졌다’라는 오늘날에는 전혀 일어날 수 없을 것만 같은 비상식적인 일이 대체 어떻게 일어나게 된 것인지 한 번 알아보겠습니다.

 

국제그룹의 첫 시작을 얘기하기 위해선 1947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데요. 국제그룹은 양정모 회장이 부산 동구에 국제고무공장사를 설립하며 시작된 기업으로 당시 ‘말표 고무신’, ‘범표 고무신’등 여러 브랜드의 고무신이 시장에 나왔지만 국제고무공장사에서 나온 ‘왕자표 고무신’이 품질이 가장 좋아 소비자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다 1960년 3월경 고무신 제조공장에서 대형 화재가 발생해 직원 62명이 숨지고 39명이 다치는 참사가 벌어졌는데요.

 

아이러니하게도 이 위기 속에서 내린 양 회장의 결단이 향후 국제그룹의 성장하는 데 있어 가장 큰 디딤돌로 작용하게 됩니다. 화제로 인해 고무신 공장 가동에 제동이 걸렸을 당시 양정모 회장은 고무신 대신 운동화를 제작하기로 하면서 사명도 국제화학으로 바꾸는데요. 당시 산업화가 시작되고 본격적으로 국민소득이 늘기 시작하면서 고무신보다는 운동화를 선호하는 분위기가 점차 번져가고 있었다고 합니다.

 

고무신과 마찬가지로 1962년 양 회장의 왕자표 운동화 역시 저렴한데 비해 품질이 뛰어나 불티나게 팔려나갔는데요. 당시 미국의 마라톤 전문지는 국내 최초로 미국에 수출된 운동화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는 왕자표 운동화를 두고 최고 품질의 운동화로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이 기세를 몰아 국제화학은 1973년 국제상사로 사명을 변경하고 증권거래소에 주식을 상장했으며, 그로부터 2년 뒤엔 정부로부터 ‘종합무역상사’로 지정됐는데요. 당시 종합무역상사로 지정된 기업은 정부가 수출을 장려하던 터라 일반 기업이 15%의 은행 대출 이자를 낼 때 7%의 이자만 내면 됐기에 많은 기업들의 부러움의 대상이었습니다.

 

 

종합무역상사로 지정된 이후 국제상사는 인실제강, 조광무역, 연합철강 등의 기업을 계속해서 인수하고 건설업, 호텔업에도 진출하는 등 공격적으로 몸집을 불려나갔는데요.

 

 

 

국제상사에서 국제그룹으로 규모가 커진 1980년에 이르러선 양정모 회장은 또 한 번의 사업적 혜안을 발휘합니다. 당시 나이키, 아디다스 등 브랜드 운동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데다 1986년 아시안게임, 1988년 올림픽을 앞두고 있어 스포츠 용품에 대한 수요가 높아질 것으로 내다본 것인데요. 이에 1981년 국제그룹은 한때 나이키와 어깨를 나란히 한 국내 스포츠 브랜드 ‘프로스펙스’를 출시합니다.

 

프로스펙스는 당시 교복 자율화에 힘입어 학생들 사이에서 큰 반응을 얻었으며, 미국 월간지인 ‘러너스 월드’로부터 미국 6대 스포츠화로 선정될 정도로 품질도 인정받았는데요. 1984년 완공된 지하 4층, 지상 28층의 위용을 자랑하는 사옥은 당시 국제그룹이 소위 ‘얼마나 잘 나갔는가’를 보여주는 지표이기도 합니다. 현재 용산역 앞 랜드마크로 잘 알려진 LS용산타워가 본래 국제그룹의 사옥이 있던 자리이죠.

 

 

그러나 사옥이 완공된 지 채 1년도 되지 않은 시점 양 회장에게 날벼락 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1985년 2월경 국제그룹의 주거래은행이던 제일은행이 “국제그룹이 부실기업으로 판명돼 그룹 전체를 정리하기로 했다”라고 공표한 것인데요. 당시 제일은행 측은 국제그룹의 해체 이유로 용산 사옥 신축으로 인한 자금난, 건설업 적자 등을 이유로 들었으나 실제론 양정모 회장이 전두환 정권에게 밉보여서 그룹이 해체됐다는 게 업계의 중론입니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여러 재단을 설립해 삼성그룹, 현대그룹 등 국내 대기업 회장을 한자리에 불러 자금 출연을 요청했는데요. 예컨대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로 숨진 희생자 유족을 지원하고자 설립된 일해 재단의 운영비를 모금하고자 자리를 마련했을 당시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51억 원,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45억 원을 헌금했을 당시 양정모 회장은 5억 원만 헌납해 미움을 샀다고 합니다.

 

특히 재계에선 1985년 2월 총선 시기가 국제그룹에겐 결정타였다고 입을 모으는데요. 당시 전두환 대통령이 부산 유세를 위해 부산 기업인인 양정모 회장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하필이면 유세 날 양 회장의 막내아들 49재와 겹쳐 아들 제사를 위해 양 회장은 유세 현장을 일찍 빠져나가야만 했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 재선에 성공한 전두환 대통령은 제일은행에 국제그룹에게 발행된 어음을 모두 부도 처리하라고 지시했으며 결국 국제그룹은 총선 이후 9일 만에 뿔뿔이 해체됐는데요. 이로 인해 국제그룹은 자사보다 규모가 한참 작은 동국제강, 극동건설 등에 분할합병됐습니다.

 

양 회장은 그룹 해체 과정을 회상하며 “자고 일어나니 기업이 해체돼 있었다"라고 표현하기도 했는데요. 실제로 양 회장은 그룹 해체 사실을 제일은행이 그룹 전체를 정리하기로 했다는 것을 발표하기 불과 30분 전에 알게 됐다고 하죠.

 

이 일로 큰 충격을 받은 양 회장의 부인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입었으며, 전두환 정권에게 밉을 보인 탓에 녹내장 수술 때문에 예약해둔 미국 병원도 출국길이 막혀 가지 못했습니다.

 

그룹 해체 후 한동안 은둔생활에 들어간 양 회장은 전두환이 1987년 6월 항쟁으로 권위가 추락하던 시점부터 ‘국제그룹의 해체가 부당하다’라는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는데요. 1987년 ‘국제그룹복권추진위원회’를 세워 소송전까지 불사한 양 회장은 청문회 증언에서 “청와대 주최 만찬에서 술에 취한 전 전 대통령이 내가 마음먹기에 따라 기업을 키울 수도, 죽일 수도 있다고 했는데 그 자리에 우리나라 10대 재벌 총수가 있었다”라며 “지금 생각해 보니 그 말이 나를 두고 한 말이더라”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양 회장은 1993년 국제그룹 해체가 부당하다는 위헌 판결이 내려짐에 따라 비로소 불명예를 씻을 수 있었는데요. 그러나 국제그룹의 계열사들은 이미 다른 기업으로 뿔뿔이 흩어져 버린 지 오래라 국제그룹의 재건은 이뤄질 리 만무했죠. 이후 양 회장은 법적 소송이 어느 정도 마무리된 1998년 부산도시가스 사외이사를 지내며 부산에 줄곧 거주하다 2009년 사망했습니다. 지금까지 독재 정권의 재벌 길들이기의 대표적 피해 사례로 손꼽히는 국제그룹의 흥망성쇠에 알아봤는데요. 지금으로선 상상할 수 없는 사례들을 접하면서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