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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전과 다르게 

이제는 예쁜 속옷이 망해가는 이유

안 입을 수도 없고...

브래지어는 우리 여성 동지들의 친구이자 적입니다. 처진 가슴을 예쁘게 모아주기도 하고, 없던 볼륨을 뿅 하고 만들어 주기도 하는 브래지어는 때때로 우릴 숨 막히게 하고 답답하게 하죠. 전혀 있을 필요가 없는 레이스나 리본이 달려 가격만 비싸지고, 오히려 겉옷의 라인을 망치기도 하고요. 그렇다고 안 입고 나가자니 혹시 비칠까 봐 걱정되죠. 벌거벗고 나가는 기분도 들고요. 정말 있어도 불편, 없어도 불편한 것이 브래지어입니다. 


이런 여성들의 심정을 반영한 것인지, 요즘 속옷 시장의 판도가 조금씩 바뀌고 있습니다. 화려하고 섹시한 속옷 대신 편하고 가벼운 속옷이 각광받기 시작한 것이죠. 이런 변화가 어디에서 시작되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지금부터 살짝 들여다보겠습니다. 


모든 모델들의 꿈, 빅토리아 시크릿


'앤젤' 이라고 들어 보셨나요? 미국의 속옷 브랜드 빅토리아 시크릿의 런웨이에 서는 모델들을 일컫는 별명인데요. 앤젤이 되는 건 쉬운 일은 아닙니다. 보통 모델들처럼 키가 크고 날씬해야 하는 것은 물론, 속옷 브랜드의 특성에 맞게 적당한 볼륨도 있어야 하죠. 게다가 하이힐을 신고 본인 덩치의 배는 되어 보이는 날개를 단 채 런웨이를 걸어야 하니 균형감각과 근력도 좋아야겠네요. 이렇게 까다로운 조건을 만족해야 앤젤이 될 수 있는 만큼, 빅토리아 시크릿의 쇼는 많은 모델들의 꿈이기도 했습니다. 핑크색 새틴 가운을 입고 백스테이지에 앉아 그야말로 '천사'같은 미소를 날리는 그녀들의 모습이 소비자들을 강렬하게 매혹하기도 했고요.


 이런 명성에 걸맞게 빅토리아 시크릿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전 세계 속옷 시장의 1/3을 점유하고 있었죠. 하지만 재작년부터 상승 폭이 주춤하더니 급기야 지난해에는 마이너스 성장으로 돌아섰습니다. 매출만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빅토리아 시크릿의 모기업의 주가도 40%가량 곤두박질쳤다고 합니다. 지난 12월 2일 저녁 10시에 방영된 2018 빅토리아 시크릿 패션쇼도 역대 최저 시청률을 기록했다는데요. 세계 최고의 모델들만 기용하는 것도, 세상 어디에도 없는 화려한 쇼를 펼치는 것도 모두 그대로인데 왜 이런 일들이 생기는 걸까요?


빛좋은 개살구는 그만


빅토리아 시크릿 속옷은 확실히 예쁘긴 합니다. 레이스도 많이 달렸고요. 색상도 화려하고 와이어도 짱짱하죠. 입으면 모델만큼은 아니어도 어딘가 섹시해진 기분도 드는데요. 하지만 그게 다 잠깐입니다. 샤워하고 나와 속옷을 입고 겉옷을 입기 전 한 1분 정도? 


출처: 인스티즈

나머지 시간은 그렇게 유쾌하지 못한데요. 밥 먹고 나면 항상 얹힌 것 같고, 찌는 여름에는 너무너무 덥습니다. 레이스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보여줄 용도가 아니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요. 얇은 겉옷 위로 울퉁불퉁 보기 싫은 자국만 만들죠.


출처: 인스티즈

이런 기분이 혹시 여성들의 착각은 아니냐고요? 그렇지가 않습니다. 가슴 바로 아래를 브래지어 밴드가 조이고 있어 소화 장애를 일으키고 혈액순환 장애를 유발한다는 것은 오래도록 정설으로 받아들여져 왔죠. 게다가 금속 와이어가 림프의 흐름을 방해해 유방암에 걸릴 확률을 높인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는데요. 그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브래지어를 24시간 착용한 여성의 유방암 발병률은 전혀 착용하지 않는 여성에 비해 무려 125 배나 높다고 합니다. 


예쁘다는 기준의 재정의


유방암에 걸릴 수도 있다는데, 그럼에도 여성들이 목숨 걸고 와이어가 들어간 브래지어를 입어 온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래야 한다'라고 배워왔기 때문입니다. 브래지어를 하지 않으면 가슴이 처지고, 처진 가슴은 예쁘지 않다고 배웠죠. 가슴이 작은 여성들은 적당한 볼륨이 있어야 여성스러운 몸매이니 영혼까지 끌어 모아주는 와이어와 패드, 일명 '뽕'이 부착된 브라를 하라고 권유받는 일이 흔했습니다. 


하지만 최근 몇 년 전부터 다른 움직임이 감지되었습니다. 나는 나다울 때 가장 예쁘고, 자연스러운 것이 아름다운 것이라는 의식이 싹트기 시작한 것이죠. 체형의 다양성을 받아들이자는 캠페인, 광고가 늘어났고 다수의 브랜드에서 플러스 사이즈 모델을 기용하거나, 사이즈의 범위를 확대하기도 했는데요. 


이런 움직임을 반영하듯, 속옷 시장에도 차츰 변화가 생겼습니다. 림프를 막는 와이어가 빠진 와이어리스 브라, 와이어가 없을 뿐 아니라 두꺼운 패드 없이 홑겹으로 만들어 통기성이 좋은 브라렛 등이 하나 둘 등장하게 된 것이죠. 팬티도 마찬가지입니다. 너무 작고 소재도 약해 신체의 보호와 위생이라는 본래의 기능을 할 수 있을까 싶던 팬티들은 차츰 신축성이 좋고 몸을 제대로 감싸는 형태로 변해갔습니다. 


사이즈도 다양해졌는데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에서는 비싼 브랜드에서나 가뭄에 콩 나듯 C컵이나 D컵을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밑 가슴둘레는 작고 컵만 큰 브라는 아예 없었고요. 해외 브랜드 제품들도 한국에는 작은 컵 위주로만 수입되었죠. 지금은 C컵 이상을 취급하는 브랜드들도 많아졌고, 작은 밑 가슴둘레에 큰 컵, 즉 65F 컵까지 제작하는 업체들도 생겼습니다. 


속옷은 입는 사람이 중요해


이러니 빅토리아 시크릿이 휘청하지 않고 버틸 리가 있나요. 게다가 빅토리아 시크릿의 속옷을 구매하는 주 소비자는 여성인데, 빅시의 쇼는 남성의 판타지를 실현하기 위한 무대라는 의견도 많습니다. 비현실적인 몸매의 여성들이 날개까지 달고 사랑스러운 미소를 날리며 흩뿌리는 금박 사이로 걸어 나오니까요. 그런 면이 연인이나 배우자에게 예쁘게 보이고 싶은 여성들의 소비심리를 자극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속옷을 입는 주체인 여성을 시선의 대상으로만 국한시킨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출처: 인스타그램 @ina.official

그래서 요즘에는 현실적인 몸매의 여성들이 현실적인 포즈로 등장하는 광고들도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 속옷을 입으면 얼마나 예뻐질지 보다 얼마나 편안하고 활동성이 좋은지를 강조하는 광고들도요. 속옷은 여성들에게 '특별한 이벤트'가 아닌 '일상을 함께하는 생활용품'에 가까우니까요. 


아무리 건강에 더 좋다고 해도, 브라를 입지 않은 채 바깥을 활보하는 게 100% 편안한 한국 여성분들이 아직 많지는 않을 거예요. 그래도 처지는 가슴보다는 소화불량과 유방암을 더 걱정하는 제품들이 나오고 있다는 건 반가운 일입니다. 앞으로 더욱 다양한 종류와 사이즈의 속옷이 등장해 모든 여성의 선택지가 쭈-욱 늘어나기를 기대합니다.